김미지
오늘이 아닌 어제와 내일에 나를 두곤 했다. 서투른 나에 대한 자책, 용기를 내지 못한 아쉬움, 홧김에 저지른 일에 대한 후회. 그 속에 있던 나의 민망함과 부끄러움, 창비함 같은 감정을 곱씹으며, 내일을 다짐하고 다음을 기약했다. 내일은 이렇게 해야지, 다음 번에는 틀리지 말아야지와 같은 작은 결심들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오랜 시간 차곡차곡 나의 어딘가에 쌓였겠다. 내일에 대한 가벼운 약속들은 아주 얇은 종잇장이 쌓이듯 켜켜이 포개어져 높은 탑이 되었다. 도무지 오를 수 없어진 무언가가 된 내일이라는 탑의 꼭대기를 우러러보며 어제에 주저 앉아 하루를 보냈다.
하염없이 탄천을 걸으며 마스크 너머로 끊임없이 나를 끌어내리는 말을 반복하던 어느 날. 난 내가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처참히 실패하는 모습을 꽤 구체적으로 상상하며, 슬픔의 이유를 끝없이 들먹이는 스스로를 비로소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잃어버린 것이 오늘이라는 것도 그제서야.
아주 아주 아주 잠깐, 아주 아주 아주 작은 용기가 났다. 늘 걷던 탄천보다 조금 더 걸어보았다. 울퉁불퉁 아스팔트만 보던 눈을 들어보았다. 까만 밤의 하늘보다 더욱 까만 언덕. 산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작고 얕은 언덕이 내 안의 슬픔을 삼킬 듯 눈앞에 쏟아졌다. 그 앞에 선 작은 나. 나는 점점 작아지고, 언덕은 점점 커졌다.
스케치북을 하나 샀다. 굴러다니는 연필을 집었다. 아주 아주 아주 잠깐 아주 아주 아주 작은 용기가 났다. 죽죽죽- 선을 그었다. 그 다음 날에는 작업실에 갔다. 예전에 사 두었던 장지를 한 장 펼쳤다. 붓에 먹을 묻히고, 종이가 까맣게 될 때까지 움직임을 계속 했다. 잠깐의 용기로 쌓이는 선들은 내 안에 새까만 무언가를 더듬었다. 주저하던 서투름과 머뭇거리던 망설임 같은 것들을 그러모았다. 죽죽죽- 한 장, 두 장, 세 장··· 종이 위에 그려낸 까만 마음들은 길게 이어지고 넓게 펼쳐졌다. 그림은 점점 커지고, 내일의 탑은 점점 낮아졌다.
나는 이제, 이 곳, 여기에 있다.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슬픔의 시간은 어느새 흘러갔다. 어제의 내가 그렇게 바라던 내일은, 비로소 오늘이 되어 넓고 길게 펼치는 이야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