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선
우리가 생각하는 밤은 각자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때로 나는 전시장에서 밤을 만나곤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밤이 모두 다르듯, 전시장에서 마주하는 밤도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밤은 무엇보다 ‘시간’이었고, 물리적인 시간이기도 하지만 관념적이며 추상적인 시간이기도 했다. 전시장에서 만났던 밤이라는 그 시간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기대했던 많은 것이 무의미한 것으로 느껴질 때, 혹은 내가 작게 느껴질 때 그 마음을 실망이라 부른다. 실망은 앞을 보기를 거부한다. 시야가 좁아지고, 과거를 되풀이하는 시간. 누구나 지나가기 위해 분투하던 그 시간 역시 밤이라 부를 수 있다. 김미지는 가장 작은 자신을 마주해야 했던 시간을 방금 막 지나왔다. 그 시간의 자국은 그의 개인전 《슬픔의 모서리》와 《긴 밤 그림자》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전시장에 들어가는 것은 작가가 경험한 검푸른 무언가 혹은 밤의 시간에 입장하는 것과도 같았다.
밤과 가까워지는 걸음, 밤과 멀어지는 걸음
검푸른 밤에 입장해 볼까. 먼저 전시 《슬픔의 모서리》를 다듬어 보자. 전시장에 들어서면 일정한 크기로 자른 장지 드로잉이 이어 붙여진 벽면이 보인다. 드로잉에는 분채와 먹 등의 동양화 재료가 주로 사용되었는데 어두운 색감이 눈에 띈다. 벽면을 채운 어두운 색의 드로잉1)은 하얀 벽과 경계를 이룬다. 이를 선으로 이어본다면 왼쪽 벽의 발목 위치에서 시작했던 경계는 정면 벽에서 눈높이까지 올라왔다가 벽이 모서리로 돌아서면서 급히 끝나, 볼록한 언덕 형상을 그린다. 언뜻 검은 단면처럼 보였던 드로잉은 가까이 다가가 보니 선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작가가 마주한 밤의 시간은 외부의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비교와 자신에 대한 실망이 뒤섞인 시간이었다. 그는 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자신의 몫을 해나가고, 성취를 이어가는 반짝이는 동료들에게 눈을 뗄 수 없었다. 모두가 뛰는 가운데 자신만 혼자 멈춰있는 게 아닌지, 심지어는 뒤로 가고 있는 게 아닌지 꾹꾹 눌러왔던 의문이 그의 마음을 가로질러 튀어나왔을 때 밤으로 변해버린 시간은 돌이킬 수 없었다.
한쪽에는 비스듬하게 내리는 비처럼 흰 뭉치의 선들이 왼쪽 아래를 향하고 있다. 이어 붙여진 드로잉을 멀리 서서 한눈에 보면, 흩날리는 나뭇잎이나 수풀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로 이어져 볼록한 형상을 만드는 드로잉들 사이로 흰 배경에 검은 글자가 쓰인 종이들2)이 듬성듬성 보인다. “밤 / 그림자의 주변 / 도망”, “작은 언덕과 / 작은 실패”, “날마다 서서히”. 이 외에도 선 드로잉 사이에 흩뿌려진 단어들이 ‘슬픔의 모서리’라는 제목과 공명하면서 그 시간을 헤아려보게 한다. 벽 한쪽에 놓인 앉을 수 있는 긴 의자 〈머무는 오늘〉에 앉아본다. 의자에 앉으려 다가가는 눈높이에는 연필 드로잉 〈장마〉가, 앉은 자리 아래로 종아리와 마주하는 면에는 보다 밝고 선명한 색감에 눈 내리는 설원 풍경을 연상시키는 〈밤 천〉 드로잉이 있다. 여기 앉아 쏟아지는 선과 흩어지는 문구들을 보면, 그가 걸었을 물리적 밤과 그가 지나왔을 관념으로서 정적 속의 밤이 그려진다. 그 밤이 내가 지나온 밤과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아주 다를 것도 없지 않을까. 《슬픔의 모서리》는 전시장에 밤을 한껏 끌어와 밤을 가까이서 보고, 그의 밤과 나의 밤을 한데서 떠올려보게 한다.
밤과 가까워지는 공간이 있다면, 밤과 멀어지게 하는 공간도 있다. 앞선 전시가 밤에 가까워지는 시도였다면, 《긴 밤 그림자》는 밤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는 시도다. 여기에도 앉을 수 있는 긴 의자 〈머무는 오늘〉3)이 있다. 낮은 채도와 명도가 주를 이루었던 앞선 전시에서와는 달리, 《긴 밤 그림자》에는 〈밤 천〉 드로잉처럼 보다 선명한 채도와 명도의 선이 등장한다. 그래서일까, 앞선 전시에 있었던 것과 비슷한 의자에 앉아 있는데도 밤을 바라보는 감상은 다르다. 공간의 좌측에는 한낮의 볕이 드는 창문이 있다. 볕이 닿는 곳으로 눈길을 옮기면 발목 언저리로 선 드로잉들이 비스듬히 열을 맞춰 누워있다. 삼각형 모양의 좌대에 붙은 드로잉들4)은 각자 크기와 향하는 각도가 다르지만, 성상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신도들처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그 뒤로는 슬픔의 모서리에서 볼 수 있었던 문자 드로잉들이 비스듬하게 기대어 놓여있다.
《긴 밤 그림자》에 전시된 드로잉은 나뭇잎이나 수풀보다는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이나 빛을 반사하는 밤바다에 가까워 보인다. 그 주변을 걷다 보면 기둥 뒤로 숨은 〈달〉 드로잉을 발견할 수 있다. 짙은 남색의 선들 위로 노랗고 둥근 형상을 떠올리는 달이 밤들 사이에 빛나고 있다. 드로잉에서 성상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신도를 떠올렸던 것도, 어둠 속의 별빛을 떠올렸던 것도 단지 우연에 불과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되뇌며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처럼, 여기는 분명 어두운 밤과 빛이 공존하고 있다.
뒤를 돌면 작고 어두운 방이 기다린다. 방의 통로에서는 부스스한 질감의 남색 실에 자개처럼 빛나는 구슬을 걸친 커튼 〈바람버들 #02〉5)가 반겨준다. 검은 실을 걷어 방 안쪽으로 발걸음을 움직인다. 방에 들어서면 키 높이의 서로 이어진 그림 〈잠잠한 걸음 - 함께〉가 나를 둥글게 둘러싸 깊은 밤으로 초대한다. 다시 커튼을 걷어 방에서 나오니, 조금 전에 마주했던 한낮의 빛이 한층 더 선명하고 눈부시다. 밤중의 별빛과 달빛은 우리를 밤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지게 한다. 그리고 검푸른 밤을 빠져나오면서 우리는 밤과 완전한 작별 인사를 할 수 있게 된다.
걷는 두 발을 보며 땅을 다지는 시간
어둠과 밝음, 느림과 빠름, 큰 것과 작은 것. 시간과 속도, 크기를 타인과 끊임없이 비교해 왔던 작가에게 밤은 물리적으로 해가 진 시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관념적으로도 정적 속으로 빠져드는 시간이었다. 작가는 《슬픔의 모서리》에 탄천 산책로의 끝에서 항상 마주했던 언덕을 벽면에 형상화했고, 《긴 밤 그림자》에는 언덕을 오가며 걸었던 산책로의 길과 풍경을 구현했다. 그가 걸었던 탄천의 산책로와 산책로 끝 언덕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두 전시는 작가가 자신의 시간과 속도, 크기를 찾아온 과정을 담고 있다.
작가는 산책로에서 몸을 움직여 걷는 행위를 통해 매일 그에게 주어진 밤의 시간을 아주 조금씩이라도 나아갈 수 있었다. 김미지가 작업하는 방식 중 가장 기본이 되는 ‘선 긋기’라는 행위는 ‘걷기’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둘 다 그 행위의 본질이 되는 가장 기초적인 움직임이라는 점이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의 본질은 선을 긋는 행위다. 여기에는 다양한 재료도 필요하지 않고, 꼼꼼한 계획 같은 것도 필요치 않다. 그저 종이에 도구를 맞대고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선 긋기를 수행하는 모든 조건이 충족된다. 걷기 역시 어떤 신발을 신든, 어디로 가든, 자리에서 일어나 다리를 움직여 이동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때문에 선 긋기와 걷기는 그 조건을 충족시켜 성취하기 쉽고, 그 성취를 반복하기도 쉽다. 그렇게 그는 한 종이에 선 긋기를 반복하며 6단계의 층을 쌓아 올리기를 거듭했다.
종이에 물감을 부을 수 있다면, 산책길을 자동차를 타고 달릴 수 있다면 선 긋기도 걷기도 필요하지 않은 행위가 될까. 성취의 횟수를 늘리기 위해 그저 종이를 채우는 것, 산책로를 왕복하는 것이 목표라면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효율적이기보다는 수고롭게 자신의 몸을 움직이기를 원한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몸을 써서 가능하면 오랫동안 최대한 천천히 하나의 일을 완수하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작품의 개수나 산책로를 왕복한 횟수가 아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지금 흐르는 이 시간을 온전히 느끼는 것,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자신의 속도와 크기를 감각하는 것이다. 버거운 시간 속에서 무작정 길을 걸었던 그는 앞은 볼 수 없었지만, 현재라는 시간을 디디고 걷는 자신의 두 발은 볼 수 있었다. 그렇게 걷기와 선 긋기라는 움직임을 한 장씩 한 장씩 쌓았다. 이것들은 되돌아볼 수 있는 기억이 되었고, 이 기억들은 다시 그를 한 걸음 한 걸음을 움직이게 했다. 이 과정은 작가에게 한 장 한 장을 완성한 스스로에 대한 단단한 믿음, 두발로 디딜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작가가 지나야 했던 밤의 시간, 특히 그 밤의 정점은 상대적 평가로 가득한 곳이었다. 산책로의 끝에는 사람보다 큰 언덕이 있었다. 언덕의 물리적인 거대함 앞에서 비슷비슷한 크기의 사람들이 서로를 비교한다는 것은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두 전시장의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문자 드로잉들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 “들숨과 날숨”, “빠르게 느릿하게”와 같이 서로 반대되거나 상대적인 두 개념을 제시했다. 이러한 개념들은 서로를 기준으로 서로를 평가하기에 혼자서는 얼마나 빠르고 느린지, 숨이 드나드는 안쪽과 바깥쪽이 어디인지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작가가 타인과 자신을 상대적으로 비교해 왔다면, 언덕을 마주한 순간 언덕이 주는 느낌은 절대적인 큼에 대한 것이었으리라. 그 언덕은 인간의 시점에서 무엇과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크다. 그가 스스로와 비교하곤 했던 타인들과 나란히 서 보아도 그 언덕은 여전히 클 것이다. 그동안 가늠해 왔던 크기의 차이는 얼마나 작고 작은 인간적인 수치였던가.
또한 이 언덕은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도 않았고, 불리는 이름도 없었다. 언덕은 크고 작음에 대한 인간적인 기준의 부질없음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작가가 그동안 결핍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던 것들 없이도, 온전히 자신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비교 대상 없이도 큰 언덕, 이름도 없고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도 않지만 그 자체로 존재하는 언덕. 그 언덕 앞에서 작가는 비로소 땅을 디딘 두 발에서부터 자신의 크기와 속도를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두 전시는 밤을 통과하면서 목격한 밤의 장면뿐만 아니라, 선 긋기를 거듭하며 쌓아 올린 현재라는 시간을 기록한다. 한편으로 그 시간을 통과하면서 작가가 느낀 상대성과 그 상대성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담고 있다. 결과적으로 작가는 선을 긋고 산책로를 걸으면서 현재 속의 나를 본다. 이로써 자신의 시간과 속도, 크기를 발견하고, 그 시간 속에서 타인과 비교하여 바라본 내가 아닌, 온전한 자신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땅을 다진다.
같은 길을 다른 걸음으로 지나기
원하는 만큼 한참 동안 밤을 바라보고 밤에 빠져 있다가, 나도 마침내 밤과 작별 인사를 했다. 《긴 밤 그림자》를 보고 돌아 나오는 길에 몇몇 장면을 다시 떠올렸다. 창문을 통과해 밤 드로잉 위로 드리운 따뜻한 햇볕. 안쪽 방의 창문 유리에 반사된 작은 달 그림. 밤 위로 낮이 떴고, 낮 위로 밤이 떠 있었다. 낮과 밤이 서로 교차하는 가운데, 탄천의 산책로를 막 빠져나가는 한 사람을 상상한다. 작가는 밤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 밤은 이제 낮에 머무는 사람이 바라본 밤이 되었다. 지금 낮에서 밤을 보는 그가 밤과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었다면, 지금 밤중에 있는 누군가도 언젠가는 밤과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밤과 가까워지던 걸음과 밤과 멀어지던 걸음이 있었다. 그리고 산책로 끝의 언덕을 향하는 걸음과 언덕을 돌아 산책로를 나가는 걸음이 있었다. 밤에 입장하던 그는 이제 밤을 퇴장한다. 그 길과 언덕은 언제나 그대로 있지만, 밤에 입장하던 그의 걸음과 밤을 퇴장하는 그의 걸음은 사뭇 다르다. 이제 그는 조금씩 앞을 보며 걸을 수 있고, 과거를 되풀이하는 와중에도 가능성을 그려볼 수 있다. 밤에서 나온 그는 밤과의 작별 인사를 뒤로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설 것이다.
김미지는 두 전시에서 밤이라는 시간의 감각을 남김없이 돌이켜보고 기록했다. 그는 마지막 남은 감촉 하나까지 모두 기록하고 난 후에 탄천 산책로의 출구를 미련 없이 밟았을 것이다. 밤의 시간은 늪지대와 비슷하다. 처음 빠지면 조급한 마음에 허우적거리다가 더 깊게 빠지고 만다. 하지만 늪에서 나오는 기술을 몸에 익힌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시 여기 빠졌을 때는 이전보다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 몇 가지 기술을 체득하고서 탄천의 산책로를 막 나온 사람은 이제 어딘가로 다시 떠날 채비를 한다. 전시는 끝났지만 두발로 단단한 땅을 딛고, 온전한 나의 존재를 찾기 위해 분투하던 밤의 시간이 기억에 남아있을 것이다. 긴 밤의 기억은 비록 앞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항상 그림자처럼 곁을 지킬 것이다.
1) 김미지, 〈슬픔의 모서리〉, 106장의 그림,각각 approx. 26.2 ×37cm, 2합 장지에 먹, 분채, 백묵, 2024.
2) 김미지, 〈슬픔의 모서리 – 내일의 말〉, 26장의 그림,각각 approx. 26 ×37 × 2.8cm, 2합 장지에 나무화판, 먹, 2024.
3) 《슬픔의 모서리》에 전시된 〈머무는 오늘〉은 47.2 ×72 × 40.5cm 크기로 1개가, 《긴 밤 그림자》에 전시된 〈머무는 오늘〉은 각각 43 ×120 × 32.6cm 크기로 총 3개가 전시장 곳곳에 놓여 있었다.
4) 김미지, 〈걷는 연습 – 긴 밤과 둑〉, 장지에 먹,분채, 백묵, 연필,목탄, 나무, 페인트,가변크기, 2024.
5) 같은 재료로 만든 〈바람버들 #01〉은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보이는 정면 벽에 전시되어 있었다.